#김취려 (金就礪, 金就呂로도 쓴다)는 고려 고종 때 #거란유종(契丹遺種) 의침략을 격퇴하는 데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무신이다. 본관은 #언양(彥陽) 으로 할아버지는 금오위(金吾衛) 섭낭장(攝郎將) #김언량(金彦良) 이고, 아버지는 금오위 대장군 #김부(金富) 이다. 어머니는 검교장군(檢校將軍) 행낭장(行郎將) 주세명(朱世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취려는 부음(父蔭)으로 정위(正尉)가 된 뒤 중랑장과 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유종이침략 하자 왕이 중군·우군·후군의 3군을 편성해 출정시켰다.
서북면 일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의 장남이 전사했다.
#거란적은 개경을 위협하더니 장단을 건너 동주(철원)를 함락하고 남하했다. 최충헌이 오군을 다시 개편하면서 #김취려 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 로 삼았다. #박달현(朴達峴)전투 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221년(고종 8)에 추밀사(樞密使) 병부상서 판삼사사
다음해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에 임명되었다.
1228년(고종 15)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에
1230년(고종 17)에 평장사 판이부사에
1232(고종 19년) 3월에 수대부(守大傅: 수태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시랑평장사
최우 무인정권이 1232년(고종 19) 6~7월에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도 강도(江都)로 이주해 문하시중에 올랐고 다음해에 특진(特進) 주국(柱國)을 받았다
#김취려 (金就礪, 金就呂로도 쓴다)는 고려 고종 때 #거란유종(契丹遺種) 의침략을 격퇴하는 데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무신이다. 본관은 #언양(彥陽) 으로 할아버지는 금오위(金吾衛) 섭낭장(攝郎將) #김언량(金彦良) 이고, 아버지는 금오위 대장군 #김부(金富) 이다. 어머니는 검교장군(檢校將軍) 행낭장(行郎將) 주세명(朱世明)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취려는 부음(父蔭)으로 정위(正尉)가 된 뒤 중랑장과 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유종이침략 하자 왕이 중군·우군·후군의 3군을 편성해 출정시켰다.
서북면 일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의 장남이 전사했다.
#거란적은 개경을 위협하더니 장단을 건너 동주(철원)를 함락하고 남하했다. 최충헌이 오군을 다시 개편하면서 #김취려 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 로 삼았다. #박달현(朴達峴)전투 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221년(고종 8)에 추밀사(樞密使) 병부상서 판삼사사
다음해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에 임명되었다.
1228년(고종 15)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에
1230년(고종 17)에 평장사 판이부사에
1232(고종 19년) 3월에 수대부(守大傅: 수태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시랑평장사
최우 무인정권이 1232년(고종 19) 6~7월에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도 강도(江都)로 이주해 문하시중에 올랐고 다음해에 특진(特進) 주국(柱國)을 받았다
1234년(고종 21) 5월 21일 강도(江都)에서 63세로 사망
7월 12일에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장례
상훈과 추모
시호 위열(威烈)을 추증받았고,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고려명장문화시중 #김취려사료집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김취려묘지명」(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1993)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증시 위열공 김공 행군기(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贈諡威烈公金公行軍記」(『익재난고(益齋亂藁』)
「김취려의 관력과 활동」(김용선, 『한국중세사연구』 30, 한국중세사학회, 2011)
「13세기 대거란전과 김취려」(윤용혁, 『한국인물사연구』 15, 한국인물사학회, 2011)
[네이버 지식백과] 김취려 [金就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