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김씨 문화공간

나는 자랑스런 언양인 (문열공 김천일 창의 제 430주년 추모제향)나주시 (2022.06.14)

운영자
2022-06-17

창의사 건재 김천일 선생이 1537년(중종32) 정월 10일 나주 홍룡동 에서 아버지 진사 김언침과 어머니 양성 이씨의 외아들로 태어날 때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이 사흘 동안 울었다고 한다. 


출생한 다음 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해 7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외조모 서씨의 돌봄으로 성장하여 13세 때 계부(季父)인 참봉 김신칩에게서 처음 글을 배우고 19세 때 일재 이항 선생 문하에서 수업한 후 사서오경의 연구와 실천에 전념하다가 37세 때 학행이 뛰어난 은일(隱逸)로 뽑혀 군기시주부를 첫 벼슬로 용안현감, 강원.경상도 도사, 사헌부지평, 임실현감, 순창군수, 담양부사를 지내고 50세 봄에 나주로 돌아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53세 때 한성부서윤으로 다시 임용되고 군자감정에 이어 수원부사가 되어 계속 세금을 내지 안던 귀족들의 토지에 세금을 부과 하였다가 그들의 모함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나주로 낙양하였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께서 의주로 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송재민, 양산용, 양산숙, 임환, 이광주, 서정후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6월 3일 도성 수복에 뜻을 같이하는 의병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6월 13일 수원 독성산성을 점거한 후 금령의 왜군을 무찔러 15급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고 왜군의 앞잡이가 된 자들을 잡아들여 처벌하니 삼도순찰군이 용인에서 패전한 후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경기도 내 민심이 진정되고 공포에 떨던 백성과 낙오된 관군들이 하루에 수백 명씩 모여들므로 그 성세가 크게 떨쳐 왜군들이 쉽사리 범접하지 못하였다. 


곽현, 양산숙을 의주행조로 보내서 한강 이남 지방 관군과 의병의 활동을 보고하고 8월 전라병사 최원과 함께 강화도에 들어가 강화부사 윤담과 더불어 성채와 전함을 보수하여 의주와 한강 이남 지역 간의 통신을 확보하고 있을 때 선조 임금께서 장예원판결사 관직과 창의사 칭호를 내렸다. 


2천여 명의 병력으로 장단의 왜군을 공격하였다가 패전한 후 유격전술로 한강 영안에 있는 왜군을 기습해서 4백여 급을 베니 양천 김포 등지의 왜군이 도망쳐 갔다. 


그해 겨울에 전라병사 최원, 경기수사 이빈, 충청수사 변양준, 경기의병장 우성전과 함께 4백여척의 병선을 이끌고 양화진에 진을 치고 여러 곳에 왜적의 죄상을 꾸짖고 우리 백성을 일께우는 방문榜文을 붙이며 도전하였고 1593년 1월 14일부터 충청수사 정걸, 경기수사 이빈 과 함께 양화진에 나아가 선유봉에 진을 치고 노량 나루터를 봉쇄하여 왜군을 고립시키고 사현의 왜군을 무찌르며 꾸준히 도전하다가 4월 19일 왜군이 도성을 비우고 퇴각 한 후에는 맨 먼저 소실된 종묘와 왜군이 침범한 선릉(성종), 정릉(중종)을 봉심한 후 군대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또 식량 천여 석을 도성으로 돌아온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나라의 근본이었던 호남 침략을 막기 위해 3백여 명을 거느리고 6월 14일 진주성에 도착하여 최경희, 황진, 고종우, 장윤, 이잠, 민여운, 이계연 등 여러 수령과 장수들이 거느린 3천여 명의 병력으로 10만 왜군과 맞서 백여 회의 처절한 공방전 끝에 큰비로 성벽이 무너지고 무기도 떨어져 6월 29일 성이 함락될 때 6만 군관민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1603년 (선조36)부터 1745년 (영조21)까지 7차에 걸쳐 선무원종 일등공신의 훈작과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의 중직과 문열공 시호와 충신 정려와 부조묘의 은전이 내려지고 1607년 (선조 40)에 나주 정렬사와 진주 창렬사에 현액이 하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