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김씨 대종회 신라김씨

 경순대왕 약사


先組 八位壇 (선조 팔위단)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송대리 능골 -


언양김씨(彦陽金氏)는 신라김씨왕족(新羅金氏王族)의 후예로서 신라(新羅)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제칠자(第七子)로서 휘(諱) 선(繕) 언양군(彦陽君)을 관시조(貫始祖)로 면면(綿綿)히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애국충신(愛國忠臣)과 열사(烈士)를 배출한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삼한(三韓)의 호족(豪族)이다.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역대인물을 상고(詳考)하여 보면 첫째로 7세손 휘(諱) 부(富)께서는 고려 의종조(毅宗朝) 김보당(金甫當)의 란(亂)후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이 문신들을 살육할 때 살상금언(殺傷禁言)을 말씀하며, 문인 자녀들을 우리의 자녀들과 결혼 사회를 안정시키자고 하여 시행 그후부터 무관이 문관을 겸직(兼職)하여 공(公)께서도 금오위 대장군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시고. 그 음덕으로 8세손 휘 취려(就礪) 위열공(威烈公)께서는 휘(諱) 부(富)를 아버지로 음직(蔭職)으로 랑장(郎將)이 된 뒤 장군으로 승진 동북계(東北界)를 진수(鎭守)하여 업적을 남겨 대장군(大將軍)이 되시고 고종(高宗) 3년 거란(契丹)의 금산왕자(金山王子)가 압록강(鴨綠江)을 침범하자 이를 맞아 크게 이겼고, 이듬해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어 여주(驪州와 충주(忠州) 제천(堤川)의 박달재에서 크게 승리했으며, 함주(咸州)에서 섬멸 거란병(契丹兵)은 여진(女眞)땅으로 달아났다 고종(高宗) 5년에 병마사(兵馬使)로 원수(元帥) 조충(趙沖)과 더불어 몽고군(蒙古軍)과 연합 거란군(契丹軍)을 강동성(江東城)에서 깨고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의 시기를 사기도 했지만 경양하는 인격이 뭇 사람을 감복게 했다고 한다. 고종(高宗)23년에 태자태부(太子太博)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별세 위열(咸烈)의 시호(諡號)를 받으신 명장군(名將軍)이며 명재상(名宰相)으로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고려(高麗) 16공신의 한분으로 배향되시고 9세손 휘 전(佺)께서는 원종조(元宗朝)에서 수사도지 문하상사 태자소전으로 첨지정사 단체도감 판사 문하시랑 평장사로 시호(諡號)는 익대공(翼載公)이시다10세손 휘 변(변) 문신공(文愼公)은 위열공의 손자(孫子)로 16세에 음보(蔭補)로 동북면판관(東北面判官)이 되고 21세때 문과(文科)에 급제 다음해에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고 이어 각문지후예부랑중(閣門視候禮部郎中)으로 원나라에서 충열왕(忠烈王)이 세자로 있을 때 보필한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충열왕(忠烈王) 16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거처 우승지(右丞旨) 봉익대부(奉翊大夫)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고 외직(外職)으로는 서북면(西北面)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냈다 그후 감찰대부(監察大夫) 광정대부(匡靖大夫)판삼사 보문각 직제학을 거처 지도첨의사사참리(知都僉議司事參理)집현전 대학사(大學士)동수국사(同修國史)를 겸하였다 공은 성정이 순수하고 돈후(敦厚)하여 간사함이 없었고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나 작은 허물의 잘못됨이 없었으니 참으로 근후(謹厚)한 군자라고 묘지명(墓誌銘)에 기록되었다.

11세손 휘 문연(文衍) 영신공(榮信公)은 충열왕조 부(父) 휘 양감(良鑑) 언양군의 3남으로 누님 축창원비(淑昌院妃)의 도움으로 밀직사(密直使)첨의중호(僉議中護)찬성사(贊成事)로 언양군(彦陽君)에 봉군(封君), 시호는 영신공(榮信公)이다. 11세손 숙창원비(淑昌院妃)김씨(金氏)는 영신공(문연)의 누님으로 왕이 세자로 원(元)나라에서 돌아와 문연의 집에서 기거하고 그후 결혼, 숙창원비가 되어 충선왕의 총애(籠愛)를 받았으며 충선왕의 복위교서에서 재상지종(宰相之宗)의 가문으로 지정되어 왕가와 결혼 할 수 있는 명문가가 되었다. 11세손 휘 윤(倫) 정열공(貞烈公)은 문신공(文愼公)의 아드님으로 음직(蔭職)으로 정도감부사(正都監副使)를 거처 감찰시승(監察侍丞)으로 큰 업적을 쌓았으며 원나라에서 충열왕(忠烈王)을 배종(陪從)할 때 일부에서 심왕(潘王)을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립하려 하자 이를 반대. 결국 충숙왕(忠肅王)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조옥(曺項)의 난(亂)때 충혜왕(忠惠王)이 화를 입게되자 잘 보필한 공으로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지고 충목왕(忠穆王)때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뒤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이 되었다. 정열공전(貞烈公傳)에는 친척에게 인자하고 친구에게 진실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친하고 않고 간에 차별이 없었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순탄할 때나 역경에 처했을 때나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정열(貞烈)이다- 12세손 휘 경직(敬直) 충경공(忠敬公)은 정열공의 2남으로 충혜왕조 문과급제하고 사도밀직(司徒密直)에 종사 왕에게 충간(忠諫)하다 섬으로 귀향 갔다가 밀직부사로 발탁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원조(元朝)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온 후찬성사(贊成事)로 영전 삼사우좌사(三司右左使)를 거처 원수(元帥)로 앞록강을 수비하고 언양부원군으로 삼중대광 양성군(陽城君)으로 서북면 도원수로 수사도상주국 언양백의 작위를 받으시고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시다.

12세손 휘 회조(希祖)은 정열공의 6자로 충목왕조에 문과 급제하여 도관정랑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라 원조에 파견 태자책봉(太子冊封)을 축하 하고 추밀원사(樞密院使)로 또 원에 파견 황태자(皇太子)의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서해도 도휘사(都揮事)로 홍건적(紅巾賊)이 침입(侵入)하여 왕의 남행을 호종(雇從)하고 개경을 지킨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첨서로 추밀원사 밀직상의로 있다가 모략(謀略)을 받아 순천으로 유배후 해명되어 상경 전리판서 예문제학(藝文提學)추밀원사(樞密院使)이시고 조선조에는 14세손 휘 곡(穀) 소윤공(小尹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언양군(彦陽君) 휘 용휘(勇輝)의 2남으로 계유(癸酉)에 문과 급제하여 부사 소윤을 역임하시고 14세손 참판공(參判公) 휘 자(緖)는 휘 수익(受益) 전라도 관찰사(觀祭使)공의 4자로 태종 8년에 문과 급제하여 이조정랑이 되었고 중시(重試) 장원(壯元)을 했다. 세종조(世宗朝)에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經筵)에 나가 대학연의(大學衍議)를 진강(進講), 박은(朴은), 유관(柳寬), 변계량(卞季良)등과 명성(名聲)을 함께 누렸다. 14세손 서헌공(西軒公) 휘 문(汶)은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지낸 휘 복생(復生)의 4자로 세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집현전학사로서 사정전훈의(思政殿訓議) 와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을 편수했고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교정 발문(跋文)을 졌다. 학통(學統)은 정몽주(鄭夢周)에서 권근(權近)을 거처 그에게 이어 졌다고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실려있다. 16세손 휘 계보(季甫) 유은공는 휘 약(躍) 참판공의 3자로 세종조(世宗朝)에서 등과(登科) 형조도관(刑曺都官)정랑이 되고 단종(端宗)양위를 보고 관직을 버리고 남원의 오대정(鰲戴亭)으로 은거(隱居) 유은옹(遊隱翁)이라 자칭하며 순창(淳昌)의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옹(翁)과 교유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17세손 공양공 휘 관(瓘)은 지의주도사(知宜州都事) 휘 숙보(叔甫)의 2자로 문종조(文宗朝)에 문과 급제하여 언관(言官)의 직을 두루 거친 뒤 부교리사도시정(副校理司導寺正)필선(弼善)동부승지 (同副承旨)오위 장(五衛將)에 오르고 신병으로 사직 장단(長湍)에서 소일타가 이조참의(吏曺參議)로 임명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조석문(曺錫文) 등과 토평(討平)하는데 공(功)을 세워 정충출기(精忠出氣)적개공신(敵愾功臣) 에 록훈(錄勳)되고 오도(五道)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병조판서 좌찬성(左贊成)에 올랐으며 언양군에 봉군(封君)되고 시호(諡號)는 공양(恭裵)으로 김제 육송사(六松祠)에 배향되시다.
18세손 휘 사지(四知)는 직장공 휘 속(涑)의 아드님으로 성종 임자에 문과(文科)급제하여 좌랑(佐郎) 정언(正言)으로 강직하고 점엽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교리 강집(姜輯)과 함경도 홍원으로 귀향가 살다가 별세하니 후손들의 입북조(入北祖)가 되었다.

18세손 휘 자수(自修) 추재공(秋齋公)은 휘 석천(石川)의 아들로 세조조 문과급제 흥문관 웅교 경연시강관을 거쳐 강원감사를 역임 청백리로 칭송을 받고, 연산군(燕山君)난정(亂政)시 강진현감으로 체임(遷任)되고 창평에 대자암을 짓고 여생을 보내시고 금산원에 위열공과 같이 배향되시고 호는 추재 이시다.

23세 휘 치룡(致龍) 참판공은 휘 남갑(南甲) 증 이조판서공의 3남으로 숙종조 문과급제 의주 광주 경주부윤 강원감사 병조참판 공조참판을 역임하시고. 그 밖에도 19세 휘 건(鍵) 덕원부사공 20세손 휘 정목(庭陸) 호조참의공 24세 휘 기석(箕錫) 사간원사간공 25세 휘 동연(東淵) 사간원사간공 29세 휘 택열(澤烈) 이조정랑공 30세 휘 명수(鳴洙) 승문원 부정자로 문과급제한 분들이다. 무공으로는14세손 휘 상(賞) 찬성공(贊成公)은 무과급제 이성계장군의 휘하에서 밀직부사 강주 도원사로 숭차 위화도 회금시 일익을 담당하고 진주목사에 임명 왜구(倭寇)토벌에서 순절(殉節) 순성익대 원종공신 태종백 좌찬성 언양백에 봉군 되시고 19세손 휘 웅상(應祥) 승지공은 휘 덕윤(德潤)신창현감의 아들로 선조조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원종공신에 책봉되고 계미(癸未)년 북호란(北胡亂)에 절제사로 출전 두망강에서 순절 좌승지로 추증 천안시지 충신록편에 등제되었으며 19세손 휘 대정(大鼎) 참판공은 선조조 무과 급제 연안부사로 임진(壬辰)에 출전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어 황해도 해주 현충사에 배향되시고 21세손 위 송수(松壽)부장공은 휘 옥령(玉齡)의 아들로 선조조 임진왜란시 의병으로 이순신 충무공 휘하에서 공을 세워 부장이 되었다. 역사에 빛나는 분은 21세 휘 천일(千鑑) 문열공(文烈公)은 진사 휘 언침(彦琛)의 아들로 연산조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은 목사공 순형(順炯)의 증손이다. 선조(宣祖) 6년에 유일(遺逸)로 뽑혀 6품직 군기시 주부에 특채된 뒤 용안현감사헌부지평을 거처 경연(經筵)에 나아갔고 순창군수에 이어 담양부사에 올랐고. 한성부서윤과 수원부사를 역임했다. 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박광옥 정담 최경회등과 창의(倡義)를 결의하고 6월에 기의군(起義軍)을 이끌고 싸움터에 나아갔다. 승승장구하는 왜군(倭軍)을 수원의 독산산성(秀山山城)에서 격파하여 아군의 사기를 진작(振作) 시켰으며 강화도로 진입하여 행재소(行在所)와 후방의 연결로를 확보하여 왕명(王命)을 소통시켰으며 병선(兵船)을 이용 서울의 적들을 괴롭혔다. 조정에서는 창의사의 호와 판결사(判決使)로 임명 포상(褒賞)하였고 진주성 싸움에서 절도사 최경회 황진 고종후 장윤등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그때 아들 상건(象乾)도 함께 순절했고 부인 김해김씨도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다. 나라에서는 영의정을 추증 문열(文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아들 상건에게는 좌승지를 추증했다. 창열(彰烈)사 정열(旌烈)사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21세손 휘 웅회(應會)께서는 귀후서 별좌(別座)에 제수 되었으나 출사치 않고 임란에 김덕령 장군과 창의(倡義)참전(參戰)하였고 김덕령 장군이 모함을 받을때는 그를 극력 변호하였으며 후에 왜적에게 모부인(母夫人)을 구하려다 왜적의 칼에 모부인(母夫人)과 같이 순절하여 구산사(龜山祠)에 배향(配享)되시고, 22세손 장무공(壯武公)휘 준(浚)은 무과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처 교동(喬桐)현감이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동참(同參)하고 도총부(都摠府)도사(都事)를 거처 죽산부사로 나갔다. 이괄의 란(亂)때 공(功)을 세웠고 이어 의주부윤에 추천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때는 안주목사겸 방어사로 분전(奮戰) 순절(殉節)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장무(壯武)라 시호(諡號)했으며, 아들 유성(有聲)과 김씨부인도 순절(殉節)하여 아들은 참의(參議)에 증직 왕(王)이 치재문을 내려 효행(孝行)을 표창(表彰)하고 삼강정려(三綱旌閭)가 하사(下賜)되었다.

22세손 구정(九鼎)은 강제공파로 통정군수 휘 김숙관(金淑灌)의 손자(孫子)로 병자(丙子)호란때 의병장(義兵將)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순절(殉節)한분이다. 24세손 언성군(彦城君) 휘 중만(重萬)은 무과 급제하였으나 출사를 않 하고 있던중 이인좌(李麟佐)의 일당이 역모를 권하여 고변사직(告變社稷)의 안보에 큰공을 세워 안흥첨사에 제수(除授)되었고 충청수사를 지내고 분무공신(奮武功臣)언성군(彦城君)에 아버지 석창(碩昌)은 언흥군에 아들 인서(麟瑞)는 언춘군에 봉하고 30세손 휘 준상(俊相) 덕명장군(德明將軍)은 동학혁명(東學革命) 총참모장으로 전봉준(全琫準)과 같이 사형을 당하여 유천(儒薦)으로 전북 김제 원평에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 박에 효정열(孝貞烈)로 가문을 빛내신 분으로는 15세손 휘 흠(欽)참봉공의 부인 벽진이씨는 선조조 임진왜란시 왜적이 공을 칼로 치거늘 부인이 몸으로 가리우고 순절 정려하여 정문을 건립 추모하고 21세손 휘 승적(承績) 용암공 휘 승서(承緖) 구암공 25세손 휘 천서(天瑞) 유령공 27세손 휘 인구(仁垢) 창촌공은 효자로서 김제 육송사에 배향 되시고25세 휘 의연(義淵) 효자로 고성이씨 열녀로 27세 휘 성령(聖齡) 효자로 28세손 휘 로회(魯熙) 효자로 조봉대부 동몽교관공으로 추증 정문을 세워 추모하며, 23세손 휘 용(墉) 국로공 25세손 휘 경연(景淵) 통덕랑공 26세손 휘 주성(柱成)영모제공 27세손 휘 걸(杰) 송오공 휘 희(熙) 송계공 휘 담령(聘齡) 광암공 29세손 준열(俊烈) 봉제공은 효자로서 족보1권 행장편에 오르신 분으로 모두 언양김씨를 빛낸 분들이다. 돌이켜보면 신라시대에서는 왕족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재상지종으로 조선조에는 충효절의장상석학(忠孝節義將相碩學)이 면면(綿綿)이 계승(繼承)되었으며, 어진 선조들이 한결같이 숭고한 기백(氣魄)을 우리후손들은 명심하여 부끄러움 없는 후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의 종문사업으로는 언양산소의 성역화사업 언양 강화의 위열공 묘역 정화사업 종보간행 언양 장학회를 창립하여 활발히 종문의 미래(未來)를 짊어질 인재육성사업(人材育成事業)을 펴고 있다.

#현대인물로는 학(學) 정(政) 재(財) 관계(官界)의 인물이 허다하나 생략한다.

 본관향(本貫鄕)의 연혁(沿革)

언양(彦陽)은 본래 신라(新羅)의 거지화현(居智火縣)인데 개칭헌양현(改稱獻陽縣)으로 양주(良州)의 영현(領縣)으로 했고 고려시울주(高麗時蔚州)에 예속하여 감무(監務)를 두웠으며 후에 언양(彦陽)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조선(朝鮮)에 와서도 그래도 따렀다.

1895년에 郡으로 昇格되였다가 1914年에 울산(蔚山)에 합병하여 속면(屬面)이 되었다가 1997年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