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김씨 대종회 신라김씨


 경순대왕 약사

경순대왕 영정(敬順大王 影幀)
- 숭혜전 봉안 -

경순대왕께서는 西紀897년에 신라의 서울 月城(지금의 慶州)에서 태어나셨고 諱는 傅(부)요 시호는 敬順이시다. 아버님은 神興大王으로 추존되신 伊滄(이창) 孝宗이시며 어머님은 신라 제49대 憲康大王의 따님이신 桂娥太后(계아태후) 桂娥夫人 김씨이시고 신라 제46대 文聖大王의 6世孫이시다.大王께서는 당초에 鷄林君 朴光佑의 따님 竹房夫人(죽방부인) 朴氏를 王妃로 맞으셔서 金富大王이신 태자 鎰(일)과 煌(황 또는 銀ㆍ굉)및 鳴鐘(명종)의 3子와 1女를 낳으셨고, 다음으로 맞이하신 王建太祖의 따님이신 樂浪公主와의 사이에 殷說(은열)ㆍ錫(석)ㆍ鍵(건)ㆍ鐥(선)ㆍ錘(추)의 5兄弟와 2女를 두셨으며 後에 樂浪公主께서 금강산 頓道庵(돈도암)으로 入山하자, 다시 順興安氏를 맞으셔서 제9자 德摯(덕지)를 얻으셨다.
서기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王都에 침입하여 신라 제55대 景哀王 朴 諱 魏안(휘 위안)을 弑害(시해)하자, 大王께서 927년 11월에 신라 第56代(新羅金氏 38代) 王位에 오르시니 이때 보령이 31세이셨다.
당시의 신라의 國情을 살펴보면, 제51대 眞聖女王 때부터 四方에 도적이 일어나고,나라 안이 어지러워지게 되었으므로 眞聖女大王께서는 그 조카인 孝恭大王에게 讓位하였다.


그러나 孝恭大王時代에는 북쪽의 궁예와 남쪽의 견훤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왕권은 날로 쇠미해졌으며, 그 위에 대왕께서는 아드님이 없이 돌아가셨으므로, 백성들이 孝恭大王의 매부이자 신라제8대대왕 아달라이사금의 먼 후손인 朴氏(諱景輝)를 세워 王으로 모시니, 이분이 곧 신라 제53대 신덕왕이시다. 神德으로 비롯된 박씨왕은 景明王ㆍ景哀王까지 3대로 그치고,그 뒤를 이어 敬順大王께서 보위에 오르시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외유내환이 겹치고 국사다난한 시기에 王位에 오르신 大王께서는 國力培養과 護國安民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시었으나,이미 기울어진 천하대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大王5년(서기931년) 2월에 高麗太祖 王建의 禮訪을 받고, 양국의 우호를 다진바 있으나, 견훤의 무도하고 광폭함은 날로 더하고, 서기 934년에 운주(지금의 忠南洪城)일대의 三十여郡(군)縣(현)이 高麗에 服屬(복속)하는 등 國土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해마다 國勢가 衰殘함으로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대왕께서는, 만약에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날로 강성해지는 고려에 항거한다면, 더불어 그 화가 백성들에게 미칠 것을 근심하시어, 고려 태조에 讓國(양국)할 것을 군신과 더불어 논의하였다. 太子(世稱 麻衣太子)께서 이를 반대하였으나, 대왕께서는 뜻을 굽히지 않으시고 서기953년 11월에 侍郞(시랑)金封休(김봉휴)로 하여금 국서를 고려 王建이 보낸 대상 王鐵(왕철)에게 전달케 하시니 이로써 新羅王朝는 992년 8개월의 사직에 終焉(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敬順大王께서 천년사직을 들어 高麗에 遜國(손국)(讓國(양국))하신 것을, 군주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민생을 생각하고, 국가존망지추에 처하여 무엇보다도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肝腦塗地(간뇌도지)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고 하시며, 무모한 항전을 포기하고 濟世救民(제세구민)을 위하여 스스로 왕좌를 물러나신 大王의 높은 뜻을 우리는 올바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王國史記 新羅本記 敬順大王條의 기록을 빌어 말한다면,「敬順大王께서 高麗왕건에게 양국하신 일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옳게 하신 일이다. 그 때, 만일 力戰死守하여 高麗軍에게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가 궁하여지면 반드시 그 種族이 覆滅(복멸)되고 화가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만약 그리 되었다고 하면, 오늘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적지 또는,地下博物館등으로 불리는 경주 일대의 유적과, 국보ㆍ보물 또는 古蹟ㆍ史蹟등 각종 문화유산을 남긴 찬란한 신라문화가 어찌 능히 보전되어 왔을 것이며, 新羅金氏의 主宗을 이루고 있는 敬順大王의 후손들과 그밖의 많은 新羅 遺民(유민)들의 후예가 어떻게 생을 부지하여 지금처럼 蕃衍(번연)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일찍이 新羅의 고도 월성(지금의 경주)의 이름 없는 시민들이, 大王의 인덕을 흠모하는 나머지 사당을 지어 大王의 影幀(영정)을 모셔놓고 祭享(제향)를 받들어 온 것은, 곧 당시의 민심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大王께서 고려에 讓國하시자 王建은 正丞公(정승공)을 봉하여 太子보다 높은 地位에 서시게하고 月城을 고쳐 慶州라하여, 이 곳을 食邑(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고려 제5대 景宗 때에 다시 尙父令(상부령)으로 삼았다.


대왕께서는 晩年에 佛綠(불록)에 뜻을 두고 名山大川을 찾아 周遊天下(주유천하) 하시다가 堤川에 이르러 離宮(이궁)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시면서 彌勒佛像(미륵불상)을 모시는 鶴樹寺(학수사)와 高自庵을 세워, 信仰과 修道에 몰입하셨다.


경순대왕릉(敬順大王陵)
- (사적24호)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

서기978年 음력4月4日에 승하하시니, 향수82세이셨으며 조호를 敬順이라하니, 이는 應天撫運之敬(응천무운지경)의 敬과 應時率德之順(응시률덕지순)의 順을 받아 敬順으로 모신 것으로, 대왕께서 天運을 헤아리시고 시류를 살피셔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하신 크나큰 仁德을 기리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된다.

大王께서 승하하신 후 이미 천여년이 지났으나, 대왕의 仁民之德을 欽慕(흠모)하는 민심은 아직도 한결 같아, 後世人들은 대왕의 失國(실국)을 허물하지 아니하고,도리어 處處(처처)에 조전을 세워 春秋로 推仰(추앙)의 香火를 받들고 있으며, 대왕의 후손들 또한, 매우 번연하여 명문거족의 대성들이 몇 백만으로 헤아리게 되었다.이는 오로지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신 대왕의 遺德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대왕의 陵寢(능침)은 長湍郡 南八里 즉,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남포면 고랑포리 성거산 줄기의 花藏龍癸坐(화장용계좌)에 모셨다.

陵享大祭(능향대제)는 매년 양력 5월 첫째주 일요일 정오이다.